본문 바로가기
해외여행/이스라엘

이스라엘 일곱째 날-1(성전산 - 황금사원, 알악사 사원, 성인식, 벧엘, 실로)

by 아르니온 2019. 11. 14.

성전산 - 황금사원

창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다는 모리아 산이 지금의 성전산이다.

 

해발 734m의 모리아 산에 바위가 있고,

그곳에 번제단이 있는데 솔로몬 왕이 처음으로 이곳에 성전을 세웠다.

그리고 주전 587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주전 20년경 헤롯이 제2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도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AD 638년 칼리프 오마르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AD 687~691년 우마야드 칼리프 아브드알-말릭이 이곳에 사원을 완성했다.

십자군 시대 잠깐 기독교가 탈환하였으나,

1187년 살라딘에 점령된 후 약 7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은 접근금지를 당했다.

1964년 알루미늄과 청동의 합금으로 보수하여 "황금사원"이란 이름을 얻었으며,

90년대 초 황금지붕은 다시 18K로 갈아 입었다.

 

이곳이 이슬람 사원이 된 것은 무함마드 알리가 이곳에서 말을 타고

승천할 때 바위도 따라 올라가려는 것을 천사가 못 올라가게

꾹 눌러놓은 자국이 있다고 하여 이곳을 신성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알리는 예루살렘을 사모하였으나

실제로 이곳을 방문하지는 못하였고,

시리아 원정을 준비하다 죽었다.

즉, 이곳은 이슬람이 주장하는 무함마드 알리와 전혀 관련이 없지만

이슬람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성지로 여겨지는 이곳에

이슬람 사원과 전설을 만들어서 자신의 종교가 더 유일하고

온전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치밀하게 계획하여

황금사원을 세웠던 것이다.

 

2000년 9월 아리엘 샤론(이스라엘 전 총리)이 성전산 무단 방문으로

촐발된 위기는 황금사원과 모슬렘 박물관 알악사 사원의

입장을 불허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성전산 출입이 봉쇄되었지만

지금은 시간에 맞추어 자유롭게 올라가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슬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

 

모슬렘 박물관 - 알악사 사원

유대인 경찰들이 만일에 대비해서 이렇게 지키고 있네요

 

성전산에서 바라보는 감람산 전경

 

성전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유대인 성인식을 직접 보게 되었네요.

유대인 소년, 소녀들은 13세가 되면 성인식을 치른다.

 이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서는 1년 동안 준비 과정을 거친다.

유대인은 이 성인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온전한 성인으로 대우를 받는다.

특히, 이 날 축의금으로 한 사람당 100만원 정도의 금액을 받으므로

축의금 액수가 상당하다.

받은 축의금은 자녀를 위해 주식이나 채권을 사서

후에 사업의 씨앗이 되도록 사용된다.

 

축제의 장으로 온 가족이 기뻐하며 축하는 성인식!

우리 일행들도 함께 축하하며 축복해 주었답니다.

 

벧엘이라 추정되는 마을

형 에서의 보복이 두려워 하란으로 도망치던 야곱이

어느 한 장소에서 자다가 꿈에 천사가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을 꾸고

그곳에 한 단을 쌓고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후에 야곱과 여호수아는 이곳에 단을 쌓고

하나님을 경배하였다.

 

벧엘은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갈라질 때 북이스라엘의 경계가 되었고,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가는 것을 금지하기 위해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워서 우상을 섬겼다.

그래서 요시야는 종교개혁 당시 벧엘의 제단을 산산이 부셨고,

그 이후 벧엘은 더 이상 역사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

왕하 23:15

 

벧엘에서 발견된 십자군 시대 교회 흔적

현재 이곳은 아랍어로 "베이틴"이라 불리는 아랍지역이다.

로빈슨은 베이틴(beitin)의 마지막 -인(in)이 히브리어 "엘"이라고 받아들여

이곳이 벧엘의 어원이 남아 있는 곳으로 보았다

엘이 인으로 바뀌는 것은 자주 목격되는 바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베이틴에서는 십자군 시대에 세워진 교회의 흔적은 발견되지만

구약 시대의 어떤 흔적도 아직까지 발견된 바 없다.

 

벧엘이라 추정되는 이곳은 팔레스타인 지역이므로

활발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는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 교회로 사용되어진

터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

 

비잔틴 시대 사용되어진 교회터가 보인다.

 

저 멀리 족장들이 걸어 다녔던 족장길도 보인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걸어 다녔던 족장길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벧엘에 한 번 들러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러나 이곳은 팔레스타인 지역이라

가끔 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할 때가 있어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다.

 

이곳은 "실로"라는 곳으로 벧엘에서 약 30분 정도

차로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실로는 법궤가 있었던 곳으로 삼상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엘리제사장, 한나, 언약궤, 블레셋 전쟁 등등

구약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익숙한 곳이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각 지파에게 땅을 나눠준 장소가

바로 실로이다. (수 18:10)

 

실로의 위치를 밝혀낸 것은 1838년 미국의 로빈슨이다.

삿 21:19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에

실로가 위치해 있는 구절을 통해 벧엘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져 있는

키르벳 세일룬을 실로라고 추정했다.

아랍어로 세일룬은 사실 실로라는 명칭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 같은 곳인데 이 안에는 성막 모형이 있다.

 

내부를 보면 교회로 사용된 건축양식이다.

 

성막 모형도!

 

실로는 도시 자체가 요새화되어 있었다.

주전 18세기 세워진 성벽의 높이는 7m 이상이었고

두께도 4m나 되었다.

 

실로는 13세기 이스라엘이 점령하기 전에는 돼지 뼈들이 발견되었으나

12세기 사사시대부터는 돼지 뼈들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이스라엘이 점령했던 곳임이 분명하다고 본다.

 

이곳에서는 실로에 대한 영상을 볼 수 있다.

 

저 아래는 회막이 있었던 장소로 추정되는 터가 발견된 곳이다.

 

실로는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세운 뒤 더 이상

종교적 장소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실로는 한동안 버려졌다가 주전 8세기 앗수르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전 잠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으나

다시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 와서 사람들이 다시 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작은 마을일 뿐이었다.

 

실로는 엘리제사장 그리고 사무엘이 활동했던 종교적 중심지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년 실로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사무엘이 죽고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면서

실로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종교적 지위를 잃고

잊혀진 땅이 되었다.